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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 장애당사자의 자리에서 다시 묻는 노동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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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햇빛촌 조회 46회 작성일 26-04-0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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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블뉴스 김경식 칼럼니스트]  산업사회권, 곧 노동권은 오랫동안 근대 복지국가의 핵심 권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단지 취업의 기회를 뜻하지 않는다. 일할 권리, 정당한 임금을 받을 권리,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 그리고 노동을 통해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권리를 함께 뜻한다.

다시 말해 노동권은 생계의 수단 이전에 시민권의 실질적 내용이다. 업로드하신 초고가 정확히 짚고 있듯, 노동권은 인간다운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권리의 핵심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엄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이 권리는 애초부터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상정하며 설계된 권리가 아니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권은 사실상 ‘표준적 노동자’를 기준으로 제도화되었다. 건강하고, 장시간 노동이 가능하며, 이동과 의사소통에 별다른 제약이 없고, 생산성을 끊임없이 증명할 수 있는 비장애 남성 노동자가 그 표준이었다. 이 구조 안에서 장애인은 노동권의 주체라기보다 복지의 대상, 보호의 대상, 혹은 노동시장 밖 존재로 취급되어 왔다. 노동권의 역사 자체가 이미 배제의 역사를 품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 역사적 배제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거의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초고는 장애인의 낮은 고용률과 열악한 고용의 질, 평균임금의 격차, 높은 비정규직 비율과 단시간 노동 비율을 통해 장애인의 노동이 여전히 ‘완전한 참여’가 아니라 ‘제한된 편입’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더 중요한 대목은 이러한 평균 수치조차 장애 내부의 격차를 가린다는 지적이다. 특히 중증 장애인의 산업사회권은 장애인 일반의 평균보다 훨씬 더 깊이 제한되어 있으며, 노동시장 진입, 고용 유지, 직무 배치, 임금 수준에서 모두 중층적 차별을 겪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장애인의 노동권’이라는 추상적 표현보다 ‘중증 장애인의 산업사회권’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더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인 전체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말하면, 가장 배제된 자의 현실은 언제나 평균 속에 묻힌다.

중증 장애당사자의 자리에서 노동권을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고용률을 조금 올리는 문제가 아니라 누가 애초에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는가를 묻는 일이다. 지금의 한국 노동시장은 여전히 노동 가능성을 인간의 권리로 보지 않고, 생산성 심사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자격처럼 다루고 있다. 중증 장애인은 바로 그 심사의 문턱에서 반복적으로 탈락해 온 사람들이다.

중증 장애인의 노동시장 배제가 개인의 기능적 한계가 아니라 “직무 설계 실패”의 결과이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중증 장애인의 실업을 개인의 몸 탓, 건강 탓, 능력 탓으로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증 장애인이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이유는 노동시장과 작업환경이 다양한 몸을 수용하도록 설계되지 않아서다. 다시 말해 문제는 중증 장애인이 ‘일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그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노동을 재구성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중증 장애인의 노동 배제는 단순한 고용문제가 아니라 정상성의 정치와 직결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일제·대면·고강도·고속 수행을 정상노동의 표준으로 놓고 있다. 출퇴근이 자유롭고, 장시간 집중이 가능하며, 피로를 개인 의지로 관리할 수 있고, 필요한 지원 없이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몸이 사실상의 기준이 된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노동자는 ‘덜 효율적’, ‘덜 유능한’, 심지어 ‘고용이 어려운 존재’로 분류된다. 중증 장애인은 노동 이전에 이미 ‘위험한 채용’, ‘관리 비용이 많이 드는 인력’, ‘팀워크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상상된다. 그 결과 산업사회권은 형식적으로는 모두의 권리이지만, 실제로는 비장애 중심의 규범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선별적 권리가 되고 만다.

현재 제도의 가장 큰 한계 중 하나는 의무고용제도가 실질적 권리 보장보다 양적 지표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일정 비율의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한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업은 부담금을 내는 편을 택할 수도 있고, 채용을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지원 필요가 적은 경증 장애인을 선호할 수 있다. 이 구조에서는 제도의 외형이 유지될수록 오히려 중증 장애인은 더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다. ‘장애인 고용’은 늘었지만 ‘중증 장애인의 고용’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가장 어려운 사람이 남겨지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핵심 문제는 합리적 편의와 지원체계가 여전히 부차적 비용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보조공학, 직무 재설계, 작업보조, 근로시간 유연화, 원격근무, 현장 코칭, 의사소통 지원은 중증 장애인의 노동권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것들이 권리 보장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 기업의 호의나 예외적 배려처럼 다뤄진다.

이렇게 되면 중증 장애인은 채용 여부 이전에 이미 “지원이 너무 많이 필요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이 비용 논리는 거꾸로 물어야 한다. 지원이 과도한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 표준만을 전제로 만든 노동구조가 지나치게 협소한 것이다.

 직업훈련과 고용지원의 단절 역시 심각하다. 초고는 훈련이 실제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취업 이후 고용 유지 단계에서 지원이 중단되는 문제를 지적했다. 특히 중증 장애인의 경우 취업 그 자체보다 고용 유지가 더 어렵다.

채용은 시작일 뿐이고,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조정과 지원은 장기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다수 제도는 취업 성사까지를 목표로 삼고, 그 이후의 노동 경험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구조가 취약하다. 결국 “한 번 채용되었는가”는 통계에 남지만, “그 사람이 존엄한 노동자로 남아 있는가”는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중증 장애당사자의 자리에서 보자면, 노동권의 본질은 취업률 몇 퍼센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보호시설이 아니라 직장에서, 시혜가 아니라 계약과 권리의 언어로, 동정이 아니라 동료성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다.

노동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노동은 사회적 관계에 존재하는 방식이며, 사회가 나를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갈 시민으로 인정하는 통로다. 그렇기 때문에 중증 장애인의 산업사회권 배제는 경제적 박탈인 동시에 존재론적 배제다. “당신은 돌봄의 대상이지 노동의 주체는 아니다”라는 사회적 판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의 방향은 첫째, 의무고용제는 단순 채용 숫자가 아니라 중증 장애인 고용 비율, 고용 유지 기간, 임금 수준, 직무의 질, 합리적 편의 제공 여부를 함께 평가하는 구조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숫자만 채운 장애인 고용은 산업사회권 보장이 아니다.

둘째, 지원고용은 시범사업이나 보조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노동권 실현의 핵심 제도로 격상되어야 한다. 직무 분석, 보조기기, 작업보조, 직무 코칭, 동료 교육, 장기 추적 지원이 하나의 통합체계로 작동해야 한다.

셋째, 노동의 개념을 다시 써야 한다. 전일제·고강도·단일 직무 수행만을 정상노동으로 보는 기준을 폐기하고, 시간제·원격근무·협업형 노동·지원기반 노동을 동등한 노동으로 인정해야 한다. 초고 역시 바로 이 점을 정책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추가로 중증 장애인의 노동권을 복지정책의 하위 항목이 아니라 시민권의 중심 의제로 재위치시키는 변화가 필요하다. 장애인 고용은 ‘배려’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중증 장애당사자를 정책의 객체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주체로 세우는 일이다. 중증 장애인의 노동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비장애인 전문가가 아니라, 매일 배제의 구조를 통과하며 살아가는 당사자다. 직무는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지, 어떤 지원이 실제로 필요한지, 무엇이 형식적 편의에 불과한지, 무엇이 노동의 존엄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현장 속 당사자의 경험에서 나온다.

결국 장애인의 산업사회권, 특히 중증 장애인의 산업사회권 문제는 ‘취업 취약계층 지원’이라는 좁은 행정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누가 노동의 주체로 인정되는가, 어떤 몸이 정상으로 간주되는가, 왜 어떤 사람은 시민이기 전에 늘 보호의 대상으로만 호명되는가를 묻는 정치적 질문이다.

진정한 노동권은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 권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노동 자체를 바꾸는 권리여야 한다. 가장 늦게까지 배제되어 온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권리는 아직 완성된 권리가 아니다. 중증 장애인의 산업사회권이 보장될 때, 비로소 노동권은 선언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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